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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09] 하나님 아버지의 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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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5-08 18:03 조회8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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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바빠졌습니다. ‘빠르다’ ‘빨라졌다’, 이것이 우리를 바쁘게 만듭니다. 정신없이 살다보니 “벌써 이리 됐나?” 싶지만 문제는 쉴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쉴 곳이 없는 것도 아닌데도 말입니다. 과거 농사를 짓거나 육체노동을 하던 때는 한숨 자고나면 되었습니다. 아무리 피곤해도 하룻밤 자고나면 또 일을 하러 나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은 육체의 피곤보다 정신적 피곤이 더 무겁습니다. 몸이 고달픈 게 아니라 머릿속이 고달프고 마음이 고달픕니다.
  송기득 교수는 「살며, 믿으며, 바라며」 라는 책에서 우리의 쉴 곳을 ‘품’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머니의 품’ 같은 품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책의 부제는 ‘어머니의 품, 하나님의 품’입니다. 그는 “오늘 우리의 사회는 어머니의 품을 잃어버렸다”고 했습니다. 근대화를 이루겠다는 오늘의 산업사회가 우리로부터 ‘어머니의 품’을 앗아간 것입니다. 몸이 아파 일을 못하더라도, 게을러 빈둥거리고 놀더라도, 그래도 용납해주는 곳이 식구들이 모여 사는 가정입니다. 가정에서는 생산능력에 따라 사람이 평가되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 산업사회는 사람의 값어치를 생산능력으로 결정합니다. 기능이 있어야 사람 취급을 받습니다.
  청소년의 방황에서 가장 큰 원인은 부모의 품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려서는 이웃 아이에게 뒤질세라 여기저기 학원으로 내몹니다. 커가면서는 성적표에 나타난 성적을 따지며 또 내몹니다. 이 아이들의 잘못된 것, 부족한 것, 몸 뿐 아니라 정신과 영혼의 피곤을 감싸 안아줄 어머니의 품이 없습니다. 집에 들어가도 마찬가지, 결국 거리를 방황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어머니들은 “내 아이는 그럴 리 없다. 얼마나 착한 아이인데. 친구 잘 못 만나 그래.” 하지만 아이들은 자신의 아픔을 얘기하지 안했을 뿐입니다. 말해 봐야 품어줄 품이 없으니까, 오히려 책망과 야단만 들으니까, 그래서 그냥 조용히 지내는 겁니다. 집 밖에서는 비슷한 또래, 비슷한 처지의 친구를 만나고 자기들끼리 아픔을 나눕니다. 결국 그 아이들이 비뚤어져가도 품어줄 품이 없습니다. 그래서 송 교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집(house)은 있어도 가정 (House)은 없다.”고 했습니다.
  북한 같은 사회주의체제는 처음부터 어머니의 품이 없었습니다. 부부가 다 기획경제의 역군으로 내몰리고, 아이들은 집단적으로 수용 당하여 부모의 품을 모르고 자라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여성들은 자신의 아름다운 몸매를 위해 아이들에게 젖먹이기를 거부했지만, 사회주의 여성들은 제도상 아이들에게 젖을 먹일 수 없었습니다. 젖을 먹일 수 없었다는 것은 결국 아이들이 처음부터 ‘어머니의 품’을 가지지 못하고 자랐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부모가 없는 것도 아닌데 품을 잃어버린 아이, 품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아무도 우리들의 품이 되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라도, 사회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KBS 다큐멘터리에 ‘가시고기의 일생 이야기’가 있습니다. 둥지를 만들고 암컷이 알을 낳으면 아비 가시고기는 밤낮으로 그걸 지킵니다. 산소공급이 잘 되도록 지느러미로 흔들어주고, 혹여 다른 고기라도 나타나면 생명 걸고 싸웁니다.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알이 부화되면 아비 가시고기는 입술이 허옇게 헐고 지느러미는 너덜거립니다. 그리고 둥지 앞에서 죽어갑니다. 그러면 다음 날 새끼 가시고기들이 모여들어 아비가시고기를 뜯어먹습니다.
  누가복음에 ‘탕자 비유’가 있습니다. 탕자, 그 못된 아들을 품어주는 아버지의 품이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천번 만 번 “그 놈은 내 아들이 아니다” 되뇌일만한 그런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돌아오자 먼 거리인데도 금방 알아보고 달려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는 아버지입니다. 이런 품이 있어야 합니다. 그 아버지는 바로 우리들의 ‘하나님’ 이십니다. 우리가 뒤늦게라도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올 때 당신의 품에 꼭 품어 주십니다. ‘나쁜 놈’이라고 책망하지 않으시고 ‘왜 그랬느냐?’고 다그치지도 않으십니다. 그냥 돌아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기뻐하시고 잔치를 베푸십니다. 그리고 품에 안으시고 다시금 당신의 상속자로 세워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품’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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